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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창조씨 역사 > 유래
순창조씨 뿌리 줄거리
순창조씨의 시조 조자장(趙子長)이 고려 초 순창에서 호장(戶長)을 지내고 대를 이어 계승하여 오다가 고려 명종 7년 (1177) 5세 조인평(趙仁平)에 이르러 계룡산의 적 망이와 망소이 등을 토평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올라 검교위대장군(檢校尉大將軍)과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역임하면서 명문 거족(巨族)으로 등장하였다.

6세 조광명(趙光明)은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를 역임하고 7세 조문정(趙文琔)은 중현대부 좌우위대호군(中顯大夫 左右衛大護軍)을 지냈으며 8세 조염(趙廉, 시호 文貞, 1293~1346)은 고려조와 원나라에서 각각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원나라에서는 심양 등로군민총관 지부사(瀋陽 等路軍民總管 知府事)를 경력 했으며 고려조에서는 광정대부 정당문학 밀직사사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政堂文學 密直司事 藝文舘 大提學 知春秋舘事 上護軍)까지 올라 두 나라에서 문명(文名)을 드높이고 슬하에는 忠과 孝의 귀감인 형제분이 배출되어 전통적인 충효 문중의 기틀을 이룩하였다.

그 한 분이 예의판서(禮儀判書)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성근명량좌리공신 중대광 순성군(誠勤明亮佐理功臣 重大匡 淳城君)에 책봉된 9세 조봉(趙縫, 시호 良度)으로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급 하자 손가락을 불살라 약에 타서 바쳐 소지공(燒指公)으로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효자요, 또 한 분은 임신년(1392) 조선을 개국하자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라며 괴산 송평으로 낙향하여 피세정(避世亭)을 세우고 그곳에서 두문 종신한 국자진사 조신(國子進士 趙紳, 호 避世)이다.

그 후 문중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도공(良度公)의 후손 중 10세 조경(趙璥, 호 西山)은 고려가 망하자 임천군사(林川郡事)의 벼슬을 버리고 서산 농막으로 돌아와 서산 처사라 자호(自號)하고 은둔하여 이태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으며, 공조전서(工曹典書), 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의 교지를 모두 거절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굳게 지켰다. 11세 조욱(趙頊)은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역임하고 12세 조이(趙怡)는 풍천부사(豐川府使)를 역임하고 16세 조방영(趙邦穎)은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냈다.

18세 조수익 趙壽益(시호 文簡 문간, 호 晩閑堂 만한당)은 부제학(副提學),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이조참판(吏曹叅判), 경상, 경기 강원 감사(監司)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 홍문관(弘文舘) 및 예문관(藝文舘)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동생인 조수항(趙壽恒, 호 一閑齋)은 효종대왕 사부(師傅)를 지냈다. 그리고 천명도해(天命圖解) 등 많은 저서를 펴낸 학자로서 명신록(名臣錄)에 등재된 21세 조위일(趙胃一, 호 丹邱子(단구자), 1706~1776) 등이 있다.

피세공(避世公)의 후손 중 12세 조종(趙悰)은 동래부사를 지낸 분으로서 이시애의 란(1467) 때 선봉장으로 나가 싸워 이를 평정하여 1468년 일등공신인 정충출기포의 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 敵愾功臣)에 추가 봉작되어 첨지 중추부사(僉知 中樞副事)를 역임하였으며, 14세 조세구(趙世球, 호 松齋 송재)는 당세에 문필이 뛰어난 분으로서 중종(1506) 때 단경왕후가 죄도 없이 폐출되고 무엄한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함을 보고 “부정한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지 아니한다.”라고 벼슬을 사양하고 괴산 송평으로 낙향하여 피세정 유허(遺墟)에 정자를 세우고 은둔한 피세군자(避世君子)이다.

15세 조복(趙服)은 함안군수와 해주판관을 역임하고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증직된 분으로서 임진왜란(1592) 때 동생 조반(趙胖, 工曹叅判)과 더불어 의병 천여 명을 규합하여 충주 남쪽 우목들에 나가 용전분투(勇戰奮鬪)하였으나 중과부족(衆寡不足)으로 조복이 전몰하니 조반은 중형(仲兄)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내고 12일 후 뒤따라 분사(憤死)하여 형제분이 다 같이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올랐다. 16세 조덕공(趙德恭)은 양지현감을 지내고 형조참의(刑曹叅議)에 증직된 분으로서 임진왜란 때 초야에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싸워 혁혁한 무공을 세우는 한편 숙부 조복이 전몰하자 즉각 정병(正兵)을 이끌고 나가 싸워 적진에서 숙부의 시체를 안고 돌아와 반장(返葬)하였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올랐다.

16세 조덕용(趙德容)은 이율곡의 문인이며 김천도찰방을 역임하고 1623년 수성금화사 별좌(修城禁火司 別坐)를 지낸 분으로서 17세 조기(趙圻, 오위도총부 오위장 五衛都摠府 五衛將)와 더불어 호남에서 일어난 최여헌의 란(1628)을 평정하여 두 분이 함께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올라 한 문중에서 9대에 걸쳐 일곱 분의 충신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순창조씨 문중은 전통적으로 忠과 孝를 으뜸으로 존중하고 국난을 맞이하면 구국(救國)의 길에 앞장섰다. 또 한 벼슬이나 명리(名利)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을 미덕으로 삼아 청렴, 결백 그리고 절제를 생명으로 하는 선비의 길을 걸어온 빛나는 문중이다.

2023. 04. 11.
제14대 순창조씨 대종회장 조 태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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